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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지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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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나라
아내가 여행을 떠났다. 친구 따라 유럽으로 떠났다. 절 모임으로 만난 불우(佛友)들끼리였다.
막 정년 퇴직을 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나를 두고 떠나서인가. 출발을 앞둔 며칠 동안은 결혼 후 최고의 서비스를 받은 것 같다.
배웅하면서 말했다. 같이 가 주는 것이 당신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었는데 하고….
함께 떠났으면 좋으련만 따라 나서지 못한 것은 막 퇴직한 직후인지라, 남아서 내가 해야 할 일도 일이려니와 누이동생 말마따나 늙어서 떠나는 해외 여행이란, 친구끼리 가면 배 맛이고 남편 따라 가면 무맛이라는데 아내 친구들 속에 끼어 눈총을 받아가며 어찌 함께 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오늘부터 의식주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잔소리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남편이 되어, 그날 오후는 북한산 백운대에 1,300여 번을 오른 산꾼 모시고 일산 재래장터에 가서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마시고 돌아와서 다음 날 일어나보니 베란다에서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아무렇게나 잠들었을 때 이불을 덮어주던 그 따스한 마음은 그동안 어느 이국 땅을 헤매고 있었는고?
떠나기 전날 무료하여 컴퓨터 고스톱을 하고 있는 나의 등에다 연신 쏟아놓던 부재 시의 주의 사항을 건성들은 것이 후회가 된다.
"아침은 두유를 드시고 미수가루 병에는 절대로 젖은 숟갈을 넣지 말아요. 수박껍질은 그냥 버리지 말고 새지 않나 이렇게 공기를 넣어보고 꼭 매어 놓아야지 아니면 고약한 냄새가 난다니까요. 외출할 때는 먼지가 들어오니 꼭 배란다 문을 닫고, 화초에 물을 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건 가스 조심해야지요. 우리들끼리만 사는 집이 아니잖아요."
준비해 놓고 간 두유와 미수가루에다 빵으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밝아오는 찌푸린 아침 공기를 가르며 낚시터를 찾았다.
보통의 경우는 맨발로 자전거를 몰고 새벽 운동과 취미를 겸해서 3km의 30분 거리를 갔으련만 오늘은 차로 갔다. 내가 나의 점심만 해결하면 되기 때문에 온종일 낚시터에서 보낼 작정이어서 여러 가지 준비물이 필요했던 것.
낚시터에서 먹을 커피, 건빵 등을 준비하고 낚시가게에 들러 지렁이를 2통씩이나 샀다. 간이 텐트까지 준비하고 충분한 떡밥과 릴 등, 챙길 것은 다 챙겼다.
비린내 난다고 아내가 질색해서 늘 놓아주고 오던 고기를 오늘은 마음껏 잡아 와야지. 그리고 부글부글 맛있게 붕어 찌개를 끓이는 거다.
붕어찌개 끓여 놓았으니 와서 곡차 한 잔하자고 친구들을 불러 멋있게 한 판을 내 집에서 벌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그 비싼 술값을 치러가며 술집을 찾는 것이 우리들 잔소리쟁이 마누라가 집을 지키고 있어서가 아니었더냐. 아내가 여행 중이라고 누가 불러봐라 나라도 두 말 없이 달려갈 것이다.
오늘은 물을 빼버리는 바람에 낭패보기 일쑤인 대화동 배수로를 버리고 항상 물이 흐르고 수량도 일정하고 깨끗한 심학산이 내려다보는 송포동 장월평천 수로를 택하기로 하였다.
폭은 작지만 꾼들이 없어 오붓한 나만의 즐거움을 맛보던 자리로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 미리미리 찾아 익혀둔 낚시터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바빠진다. 어느 녀석이 눈 도장 찍어 논 내 자리에 먼저 와서 있으면 어쩌나 해서다. 그러나 낚시꾼 중에 이곳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 휴일에도 인적이 드문 후미진 곳이다.
-그렇지 그곳의 붕어는 씨알이 굵었어. 남보다 큰 내 손으로 잡아도 머리와 꼬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적어도 13cm 이상이었어라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생각했던 곳에 낚시를 폈다. 항상 떡밥으로 승부 하던 내가 오늘은 지렁이를 가져온 것이다
꿈틀대는 시각(視覺)이 정적인 후각(嗅覺)보다 더 강하지 않던가. 작년에도 금년에도 참붕어 월척한 실력의 솜씨로 그 좋다는 떡밥 그루덴까지 준비했으니 낚시에서의 숙달된 사수(射手)가 소총과 기관총을 다 준비한 셈이 된다.
오늘은 엄지손가락이 입으로 들어간다는 월척이 나올 듯한 예감마저 든다.
벌써 떠올라 찌푸린 하늘의 구름 속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 해를 보며 떡밥을 개기 전에 지렁이를 안주 삼아 흐르는 물 강심(江心)에다 찌를 꽂았다.
입질이 온다. 던지자마자 어신(漁信)이 온다. 묵직한 놈들이 낚싯대를 휘며 연신 대롱대롱 매달려나온다. 두 번째 받침대를 펴기도 전이다.
이렇게 한동안, 오랜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렇게 큰놈으로 이렇게 많이 잡는 처음의 행복을 정신없이 만끽하였다. 몇 번씻이나 쌍방울처럼 두 마리가 한꺼번에 묵직하게 줄을 당긴다. 어망(魚網)에서 고기 뛰는 소리가 소년의 마음 같이 나를 즐겁고 신나게 하였다.
그렇다 대어(大魚)를 잡자, 자가 넘는 월척(越尺)을. 통지렁이를 반으로 짤라 5호 바늘에 나누어 끼었다. 지렁이가 몸을 꼬아 댄다. 지렁이 한 마리에 붕어 하나씩 올라온다. 삼봉 떡밥에는 연신 잉어 새끼가 찌를 물고 물 속으로 들어간
다. 이렇게 나가다보면 고기의 호텔이라 해서 산 널찍한 어망이 가득하게 채워질 것 같다.
차를 가져온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아까부터 찌푸린 하늘에서 가끔씩 떨구는 비방울이 수면에 크게 원을 그려 대더니 빗소리와 함께 작은 원을 수없이 그리고 있다.
비를 맞아가며 준비해간 간이 텐트를 부지런히 폈다. 물실호기(勿失好機)라 평생에 처음 맞는 이런 기회를 어찌 놓칠 수가 있으랴. 얼마 있다 그치겠지.
그런데 그친 것은 빗줄기가 아니라 어신(漁信)이었다. 그러면 아까 왕성했던 입질은 비오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는가.
비가 오기 시작하고도 한동안, 저 아래 낚시꾼도 나처럼 버티고 있는 모양이더니 부릉 차소리가 부르릉 나는 걸 보니 철수해 가는 모양이다.
어망 속에 펄쩍펄쩍 뛰는 고기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굵어지는 비를 맞으며 어쩔 수 없이 나도 낚시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비에 흠뻑 젖은 나의 몰골처럼 엉망이 된 낚시 장비였지만 막연한 기대가 실현되었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낚시박스에 고기를 담아 넣었다. 아까의 기쁨만큼이나 묵직하다.
그렇게 커 보이던 붕어를 낚시박스 물 속에 넣고 위에서 내려다보니 절반 정도로 작아 보인다.
잡은 놈을 그냥 놔주기가 아까워서 낚시를 갈 때마다 허리에 차고 다니던 자가 달린 낚시칼로 크기를 가름해 보니 거의 다 13cm 이상 것들이다. 그 중 20여cm 이상 되는 몇 마리중에 24cm 되는 것도 있다.
오늘 낚시는 기대 이상이었다.
서운하게도 얼마나 잡았나 물어 보는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고 텅 빈집에 돌아왔다.
부엌에 들어갔다. 아내가 있었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 베란다로만 향하여도 불자(佛者)인 아내에게 핀잔과 구박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왜 방생하지 않고 가져왔느냐고.
그 아내가 저 먼 나라 여행 중인데 누가 있어 나를 관여하랴.
아내가 없어서 좋은 점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놈의 항문을 칼로 푹 찔러서 그 배를 머리를 향하여 쭈욱 가르고 창자를 꺼내는 거다. 비늘을 긁어내고 한강 고기라 냄새가 날지고 모르니 아가미까지 도려내야지.
칼끝이 붕어의 몸에 닿자 고기가 꿈틀하는 순간 벨이 요란히 울린다. 누구의 전화일까?
"여보, 여기 로마인데 저 나포리로 가려고 해요. 집에 별 일 없죠? 끊어요."
아내의 전화였다. 별일 없다니,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는 비린내를 풍기며 이렇게 살생(殺生)을 하려는 참인데, 그곳이 바로 자기의 나라 집무실 바로 부엌인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아시아올림픽 개막식 하던 날 견지낚시에 미쳐서 팔당에 배를 띄우고 팔뚝만한 눈치를 건져 올리며 흥분하고 있을 때, 강가에서 열심히 염불하며 방생(放生)하던 불자(佛者)들의 생각이 난다. 마침 그날이 초파일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윤회사상(輪廻思想)이 아니라도 생명체(生命體)를 방생함으로써 나와 이웃과 사회의 복을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원하던 세계여행을 홀로 떠난다고 그렇게 미안해하면서 병약한 아내가 링게르를 맞으며 누워있던 생각이 난다.
-걱정 마세요. 이이는요 외국 여행을 가서는요 펄펄 뛰는 건강을 찾는 별종이라니까요.
외국 여행 떠나는 딸을 걱정하는 팔순(八旬)의 장모님께 내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런 아내가 어쩌면 위험한 비행기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가 그렇게 싫어하는 살생(殺生)을 하다니 그것도 부엌, 아내의 나라 집무실에서….
그렇다. 방생(放生)을 해 주자. 불자(佛者)인 그의 친구들과 함께 떠난 아내의 즐거운 여행과 무사한 귀국을 위해서.
잡아온 붕어 중, 그 동안 죽은 놈이 하나도 없는 것이나, 살생의 순간에 맞추어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나 이런 것들 하나 하나가 커다란 분의 뜻인 것 같다.
이렇게 살아있는 생명체를 방생하는 것은 아내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붕어 모두를 다시 낚시박스에 주워담았다.
그들을 잡아온 곳으로 되짚어 가는 길의 마음은 유난히도 가벼웠다.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 속에 아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었구나. 의식주 모두를 관장한 아내의 나라에 사는 나는 하나의 그의 백성에 지나지 않았구나.
어느새 비는 그치고 태양은 중천에 하얗게 떠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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