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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결의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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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밤의 꿈(1)
무더운 날씨 탓인지, 도대체 나의 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침
대 모서리에 놓인 베개로 등을 고인 채, 쓸모 없는 하루의 헛일
에 누적된 피로로 인해 초점이 제대로 맞지도 않는 눈은 기억에
한 가닥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는 책 속의 글자를 쫓는다. 눈길
이 스치고 간 글자들 속으로 시간들이 스며든다. 어느 정도의 시
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어찌 생각하면 아득한 것도 같
고, 아주 가까운 것도 같은 곳으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실은 들리는 것인지 들리는 것처럼 생각되는 지조차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 속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소리는 어릴 적에 어
슴푸레한 잠결에 들었던 할머니의 성경책 읽는 소리처럼 자장가
가 되어 내 몸을 깊은 잠의 나락으로 자꾸만 유혹한다.
호젓한, 아니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호젓하게 느껴지는 산
모퉁이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등에는
큼지막한 낚시 가방을 둘러메곤 그 가방의 무게 때문인 지, 아니
면 머리 위에서 혼자만의 세상인 양 큰 눈을 치켜 뜨고 세상을
노려보는 태양 때문인 지 머릿속으로부터 시작하여 얼굴을 핥고
지나가 턱의 경사를 이기지 못해 끊임없이 떨어지는 땀방울로 산
길 곳곳을 적시며 그렇게 걷고 있었다. 그러나 외양과는 다르게
마음은 오랜만에 도심을 벗어났다는 생각으로 들 떠 있었고, 들
뜬 만큼 무게를 감해서 인 지 발걸음은 가볍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것이다. 분명 손에 들려진 쪽지에 인
쇄된 글에 따른다면, 벌써 산등성을 향해 오르는 길이 나왔어야
하고, 지금쯤엔 물가에 앉아 세월을 낚든 지, 아니면 붕어를 낚든
지 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길을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만 할 뿐
내가 목표로 하는 길은 내어놓지 않고 있다. 일단 한 가닥의 의
심이 마음의 한 구석에서 일기 시작하자 장마철 댐 둑이 무너져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 듯이 순식간에 의심은 마음을 검은
색으로 도배를 한다. 의심의 무게가 커져 가는 만큼 발걸음도 흔
들리기 시작하고, 세월의 무게에 눌렸음직한 등 굽은 노송이 눈
에 들어오자 발걸음은 기어이 나무 밑에 멈추고 만다. 노송은 가
녀린 손을 들어 태양의 매서운 눈길을 그 손의 크기만큼 가리고
있고, 그 조그만 그늘의 속으로 나는 들어섰고 등의 가방을 내려
궁둥이 밑에 깔았다.
얼마쯤을 쉬었을까, 이제는 이미 구겨져 호주머니 속에 쳐 박힌
쪽지 속의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즈음에 어디선가 한
가닥의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은 공교롭게도 주변의 모든 것
을 포기하고 나만을 선택해 밀어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서로
밀고 버티고의 싸움은 싱겁게 바람의 승리로 끝이 났고, 나는 어
쩔 줄 모르고 가방의 끈을 물 속에 빠진 자의 지푸라기라도 되는
냥 온 힘을 주어 끌어안은 채 허공으로 떠올랐다.
뒤뚱거리는 몸을 가누기 위해 온 힘을 다 소진하고, 될 대로 되
라는 마음이 자리 잡을 즈음이 되서야 이상하게도 균형은 이루어
졌고, 이렇게 날려 가는 것도 괜찮네 하는 생각이 뒤를 따랐다.
낚시가방을 탄 채 바람에 날려가며 밑으로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
보는 즐거움도 잠시였고 이제는 이 높은 곳에서 내동댕이쳐질 일
이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고, 그 걱정에 마음이 흔들렸는지 자연
스럽게 바람을 타고 날던 몸이 다시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온 것은 이때였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내
가 속삭일 어느 누군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걱정스런 마
음이 헛소릴 들었겠지 하고 단정할 즈음 그 목소리는 다시 이어
졌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
그러면 네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어차피 내 마음대로 안전하게 내려 갈 수도 없는 상태이니 그대
로 해 보자는 마음이 생겼고, 내게 속삭이는 것이 누군지 궁금함
이 일었다.
누구?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누구지?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또한 나처럼 바람에 날려 허공을 날고
있을 사람이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바람이니?
내 혼잣말 같은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시 그 목소리가 들
려 왔다.
그래, 난 바람이야.
네가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널 안고 가는 나도 덜 어렵지.
혹여 내가 널 놓치기라도 하면 넌 아까 네 생각대로 저 아래 땅
위로 내동댕이쳐 질 거야. 그런 이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지.
그러니 맘을 편하게 가져.
그리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생각만 해.
그럼 내가 널 데리고 갈게.
그러면 넌 근두운과 같은 거야?
마음에도 없이 불현듯 뛰쳐나온 나의 질문이 너무 어이가 없었던
지 이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바람이 시키는 대
로 마음을 가능한 한 편하게 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편
안한 마음인 지를 알 수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몇 번인가의
뒤뚱거림을 되풀이하고 난 후 비로소 안정된 자세를 유지할 수가
있었고, 자세가 안정되자 바람이 이야기했던 마음대로 될 거란
말이 생각이 났고 그대로 해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호주머니에 쳐 박혀있던 쪽지를 꺼내 다시 저수지의 위치를 찾아
가는 방법을 읽어보고 난 후 아래를 굽어보니 멀리 손바닥만한
저수지가 눈에 띄었고, 그 곳을 확인하는 순간에 벌써 몸은 그곳
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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