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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결의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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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륵,
커피 끓인 습기에 성애가 잔뜩 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 드는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든다.
맨발로 선 발가락이 오므라 들만큼 차다.
양손으로 감아 쥔 머그잔의 따스한 온기가 좋다.
멀리 보이는 외설악 봉우리들과 능선이 솜씨 좋은 옛화백의 묵화 같다.
걸치고 나온 두툼한 까운 주머니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
지포라이타를 켜 댔다.
주홍빛 불꽃에 기름 냄새가 좋다.
발이 시려워
뒤돌아서 탁자에 커피잔을 내려 놓고 폭신한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
눈 덮힌 외설악 낮은 곳에 파묻히듯 지어진 콘도.
창밖으로 내 뿜는 담배 연기가 밀려 드든 찬바람에 흩 뿌려져 돌아 온다.
한겨울의 차가움을 얼굴로 상쾌하다 느끼며 까운 옷자락을 여미던 정수는
매년 처럼 슬픈 추억을 되살려 낸다
아우성 치며 제대후 복학한 대학 삼년차 겨울방학.
지난 여름방학 때 책 한권도 들고 다니기 귀찮아 하는 친구 서넛이 진부령을 찾았었다.
장마비로 인해 아쉽게 돌아 섰던 진부령.
신년 해맞이 촬영을 위해 그곳 흘리산장으로 가기로 했다.
아버님께서 대학 선물로 사주신 핫셀브라드 중형 카메라는 정수가 유일하게
들고 다니는 거추장 스러움을 마다 않는 것이었다. 비싸기도하지만 정수의 밥그릇이 될것이니.
창고로 쓰던 작은 방을 암실로 개조하여 인화와 현상을 하는 시간과
넋 놓고 앉아 묵직한 고전 음악을 듣는 시간, 그리고 사진 찍느라 돌아 다니는
시간이 정수의 즐거움 이었다.
함께간 세녀석도 엇비슷하다 보니 죽이 맞았고 어울려 다녔다.
옷맵시 까지도 비슷한 찍사패거리다.
다른 녀석들이 미팅입네 동아리 모임임네 엠티임네 설치며 다닐때도
정수패거리는 막걸리 한주전자에 김치두부나 노가리를 안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나름대로의 개똥철학으로 침을 튀기곤 했다.
남들 자주 다니던 명동 카네기나 오비스케빈 같은 곳은 적성에 안 맞았다.
그딴곳 가려면 차라리 기원에 틀어 박혀 혓바늘이 돋도록 줄담배 피우기를
좋와하는 녀석들이다.
당연 변변한 여자 친구 하나 없고 별 관심도 없다.
그해 12월 27일 일주일 예정으로 출발한 정수패거리를 실은 뻐스가
마장동서 점심 전 출발하여 해질녘 진부령에 도착했다.
진부령 꼭대기 뻐스 정거장에서 내려 흘리 산장 까지는 두어시간 족히 걸어야 한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임에도 눈길을 빠지며 걷고 있는 정수의 등엔
땀이 흐르고 빵모자 벗어 든 머리위에도 김이 서린다.
짊어진 작은 배낭에는 흑백필림과 커피와 담배가 전부다.
산장에 미리 연락을 해 두었으니 숙식은 돈으로 해결 하면 될것이다.
구름 한점 없이 깨질듯 맑은 비취빛이었던 하늘엔 설악으로 넘어 가다 걸린 태양의
안간 힘에 붉게 물 들었다, 산도 땅도 정수의 마음도.
부랴부랴 카메라를 꺼내 든 정수는 파인더에 잡힌 맘에 드는 작은 세상을 골라
노출계도 없이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와 앵글을 바꿔 가며 여러번 셔터를 눌러 댔다.
휠터를 갈아 끼우고 역광으로 찍은 마지막 두 컷 까지 꼼꼼히 수첩에 메모를 했다.
붉게 물든 산과 들을 바라보는 정수의 마음도 붉게 물 들었고
웅장한 아름다움에 코 끝이 찡해 졌다.
큰 세상과 카메라 파인더에 잡힌 부분적으로 축소된 아름다움.
이 큰 아름다움을 작은 카메라로 잡는다는 것이 무모한 시도라 생각 되었다.
어둑한 시간 통나무를 켜 벽을 댄 산장의 윤곽이 저만큼 보인다.
땀을 흘리며 걸어 온 정수일행이 산장에 도착 했을때
맛있는 김치찌계 내음이 회를 동하게 했다.
홍천에서 막국수로 점심을 때운 일행이 먹은것은 걸어 오며 먹은 쵸콜릿 한봉이 전부다.
‘계십니까?’ 노크를 하는둥 마는둥 문을 열고 들어 섰다.
습기찬 따뜻함이 느껴 지고 문에 매달린 투박한 종에서 떨렁이는 소리가 난다.
통나무 잘라 만든 긴 식탁에 열명 가량 모여 앉아 식사중이다.
시끌하게 먹다 말고 수저를 든채로 발에 눈을 터느라 쿵쿵거리며
들어오는 정수 일행을 조금은 놀란 눈빛으로 바라 본다.
그들을 처음 반긴사람은 산장을 관리 하는 듯한 젊은 청년이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지요’하며
장작불이 활활 타 오르는 벽난로 앞 통나무 의자로 안내 했다.
‘이러쿵 저러쿵 지난번 말씀 드렸던 어쩌구 저쩌구 서정숩니다.’
‘아! 예 그러지 않아도 기다렸는데 날이 저물길래 낼 오시나 했습니다’
‘예! 오는 중에 뭣줌 하느라 늦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밥이 모자르네요’
꽁치 통조림을 넣고 끓인 김치 찌계에 물을 더 넣고 라면까지 끓여
허겁지겁 해치운 정수 일행은 샘물로 끓인 커피 한잔씩을 들고서야
이틀전 먼저 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차근차근 실내를 둘러 볼수 있었다.
관리인으로 짐작 했던 젊은이는 정수보다 여섯살이나 나이가 많은
산장 주인집 아들이었고 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일년에 반 이상을 이곳서 생활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평소에는 이 동네 사시는 나이 드신 아저씨가 이곳을 지키며 집수리도 하고
겨울철 땔감도 준비하는 대가로 얼마만큼의 수고비를 받고 있었다.
눈 쌓인 겨울이면 옴짝 못하는 이곳에서는 그 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어쩌다 옹노나 덫으로 잡아 오는 산짐승 고기로 술 안주를 하고
그럴때는 으레 집에서 담가 놓은 옥수수 동동주를 단지채로 지게에 지고 오셨다.
정수 일행이 도착한 그날도 마침 뒤 처마 아래 광주리에 넣어 매달아 두었던
꿩 두마리와 산토끼 한마리를 잡기로 했고 미리 갖다 두었던 동동주 단지를 열었다.
향긋한 잘 익은 옥수수 술내음이 흘러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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