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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결의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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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웃으면서 말한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너무 미인이어서요! 꼭 여우에게 혼을 빼앗긴 듯 하네요!"
"호호호! 그렇다면 제가 사람의 혼을 빼앗는 여우라는
말씀인가요?"
"여자는 다 여우라고 하던데, 아가씨는 혼만 빼앗는게
아니라 간,쓸개까지 빼먹을 것 같네요!"
"호호호호호호호호!" 이 아가씨가 허리를 앞으로 꺽어가며
한참동안 자지러지게 웃는다.
"왜 자꾸 남자들은 여자보고 여우라고 하죠?"
"모든 여자에게 여우라고 하는게 아녀요! 이쁘고 눈치빠르고
하는짓이 깜찍한 여자를 여우라고 하죠"
"그럼, 여우라는 말이 그리 나쁜 말이 아니네요?"
"그럼요!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아까 다리를
다친것 같은데 괜찮아요?"
"좀 다친것 같아요"
바지를 올리고 살펴보니 찰과상을 조금 심하게 입어 무릎이
피범벅이다.
"제가 가서 약과 붕대를 구해 올께요, 기다리세요"
"지금 움직였다가 진압대에 붙들리기라도 하면 어쩔려고요"
"괜찮아요! 군인신분증을 가지고 있으니까 설마 군인이 시위에
참가하리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당연히 프리패스죠,걱정말아요"
모든 상가가 철시중이라 약국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30여분을 헤맨 끝에 문을 닫은 약국의 주인을 수소문하여
전후사정을 이야기한후 소독약과 붕대등을 구할 수 있었는데
약국주인이 약값을 받지도 않고, 다함께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거리에 나섰는데 어떻게 약값을 받겠냐면서 빨리 치유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 당시는 시민들의 민주화요구가
활화산처럼 분출하던 시기라 이토록 협조적이었다.
나는 오면서 생각하였다.
어쩌다가 뜻하지 않게 데모를 하게 되었고 백골단에게 끌려가는
여자애를 구하는 운명에 처하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오랜만에 서울에 온 김에 술이나 한잔 가볍게 하려고 이 곳을
찾았는데...
여자애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지, 빨리 가 봐야겠다. 그런데 내가 처음 본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신분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
어느덧 그녀가 기다리는 지하창고에 다다랐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 무릎을 보여줘요"
알코올과 탈지면으로 상처를 깨끗이 닦아내고 연고를 바른다음에
붕대를 정성껏 돌려 감았다.
"너무 고마워요!"
그녀가 맑고 고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참,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그녀가 내게 이름을 물어본다.
"이름은 알아서 뭐해요! 어차피 헤어질 텐데.."
하지만 그녀와는 그냥 헤어지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그래도 목숨 걸고 저를 구해 주셨는데 이름정도는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준홉니다. 김준호. 아가씨 이름은요?"
"오다영이예요"
"다영이, 예쁜 이름이네요, 생기신 것처럼"
"참, 곧 제대를 하실거라고 하셨는데 언제 제대하나요?"
"올해 11월말 제대할 겁니다"
"제대후 뭘 하실 건가요?"
"글쎄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는데 아무래도 취직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겠죠"
"그나저나 이 불안한 정국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네요?"
"역사의 흐름을 보면 대세라는 시대적 흐름을 막으려는 것은
무모한 짓이죠. 온 국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고 그것이 거스를수
없는 물결이라면 곧 이 혼란의 시대도 종언을 고하고 국민들이
바라는 그러한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시기가 언제일까요?"
"그야 알수없죠!, 그러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군고문
은폐사건폭로이후 국민들의 군사독재정권에 저항과 분노가 극에
달한 만큼 머지않아 어떤 형태로든 결말이 나겠지요!"
어느덧 4-5시간이 흐른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이제는 어느정도 시위가 가라
앉은것 같으니 나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한다.
그녀를 부축하고 계단을 올라오는데 아까 경황없이 도망치다가
상가로 뛰어든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등에 업었던 그녀의
따스한 젖가슴의 감촉이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우리 어디가서 저녁이나 먹어요?"
그녀가 배가 조금 고픈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프다.
명동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시위가 끝나고 여러시간이 경과 되어서인지 문을 연 집이
많았다.
경양식집으로 들어섰다.
웨이타가 주문을 받는다.
"비후까스로 주세요"
"저도 같은 걸로요"
"다영씨는 대학생인것 같은데 왜 여자의 몸으로 이 시위의
현장에 나서게 되었죠?"
"우리 여자들은 남자애들 뒤에서 보도블럭을 깨서 전달해주고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것이 주임무예요.
물론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여자애들도 많아요.
저는 오늘 다른 여자애들하고 같이 보도블럭을 깨다가 백골단이
갑자기 뒤에서 덮치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혀 끌려가게 되었고
그때 준호씨 일행이 구해주게 된 거예요"
"그럼, 여자들은 끌려가면 어떻게 되나요?
제가 알기로는 상당히 모욕적인 일을 당하기도 한다고 하던데..."
"제가 알기로도 그런걸로 알고 있어요,
상체를 벗기고 가슴을 만지는 것은 예사고 어떤 경우에는
옷을 모두 벗기고 성추행도 한다고 하는데 여자들은 그런일을
당해도 부끄러워서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여요.
저도 아까 끌려가면서 그런 장면이 떠올라 너무 무서웠는데
준호씨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게 되어서 너무 고마워요"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나는 어쩌면 그녀와 숙명이라는 굴레에 속박될지도
모른다. "
처음 만난 그녀이지만 내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느덧 식사가 나왔다.
"자, 어서 드세요"
"네, 준호씨도요"
비후까스를 썰어 먹으면서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글쎄요, 오늘의 이런 시국이 개탄스러워서 그래요.
다영씨 같이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시위를 해야하는 이 시국이...
"준호씨는 군인의 신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참가했잖아요?"
"그렇지만 뜻있는 청년들은 벌써 수십명이나 민주화를 위해 분신자살
내지는 모진 고문끝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버렸는데
제가 시위에 참가한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지 않아요, 군인의 신분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것 또한
쉬운일이 아니며 또 백골단에 쫓기면서도 절 버리지 않고
구해주셨잖아요"
"전 어릴적부터 여자애들이랑 잘 어울려 놀았어요.
그리고 여자들은 절대로 때려서는 안되고 항상 보호해줘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어머, 그럼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겠네요.
참, 실례지만 이런 거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준호씨 애인 있어요?"
"애인요? 아직 애인 없어요"
"피~! 거짓말, 내가 보기에는 있을것 같은데..!"
"정말 없어요!"
"정말?"
"네! 정말 없어요! 저는 꼭 책임질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에게 히든카드를 던질 겁니다"
"그렇다면 준호씨는 제가 책임질 가치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지요? 그리고 그런 판단이 선다면 제게 그 히든카드를
던질건지요?"
"글쎄요! 다영씨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찮아요
그러니 아직 그 질문에 답을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부적절한것
같네요"
"그럼, 알고 싶은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저도 다영씨와 똑같은 질문을 드릴께요, 솔직히 답변해 주세요.
다영씨 애인 있어요?"
"저도 아직은 딱히 애인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없어요.
저를 좋다고 데이트 신청하거나 제게 추근대는 남자는 있지만
저와 그저 친하게 지내는 선배오빠정도지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는 없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스운 일이다.
우연히 나왔다가 최루가스가 난무하고 시위대와 진압대와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현장에서 만난 두 남녀가 몇시간만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상대에게 애인이 있는지 그것부터
관심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덧, 저녁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녀는 내가 식사비를 계산하려는 것을 부득부득 만류하며
기어코 그녀가 계산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곧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녀에게는 그녀의 갈길이 있고, 나는 나대로 갈길이
있다. 곤경에 처한 그녀를 도와 주었다고 하여 그걸 빌미로
그녀에게 추근대는 인상을 심어주어서는 안된다."
그녀와 나란히 명동을 빠져나왔다.
"자, 다영씨 이제는 헤어져야 할 것 같아요,
다음부터는 또 붙잡혀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되도록이면 시위에는 참가하는 않는 것이 좋을것 같네요
다영씨가 아니어도 다른사람이 할테니, 여자의 몸으로
무리한 시위는 참가하지 말아요. 그럼, 이만"
"잠깐, 잠깐만요,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수도
없잖아요! 연락처라도 주셔야죠"
"어차피 사람은 각자 갈길이 따로 있어요.
전 비록 얼마 남지 않았지만 군인의 길을 가야하고
다영씨는 학생의 신분으로 되돌아가야 하잖아요.
오늘일을 너무 염두에 둘것 없어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은 도와주는 것이 도리잖아요"
"준호씨, 이대로 헤어질수는 없어요.
비록 오늘 처음 우연히 만났지만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다음에 만날 일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연락처는
주실수 있는 것 아녀요"
그녀의 집요함에 결국 내 연락처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내가 됐다고 하는데도 그녀의 연락처를 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가 헤어지면서 말한다.
"준호씨! 다음에 꼭 연락하셔야 돼요, 꼭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면서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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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아닙니다.
[계속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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