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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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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지 인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이휘소 : 낚시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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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미국의 횡포를 보면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생각이 든다.
만약 박대통련 생존시 이휘소 박사만 의문사를 당하지 않고 계획대로 핵 개발이 됐으면 지금같은 굴욕적인 쇼파협정에 얽메여 쩔쩔매고 있을까 ?
횡포에 가까운 주한미군들의 볼성 사나운 꼴을 보면 이휘소박사가 더욱 그리워진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장편 소설의 주인공 이용후박사 그는 한국이 낳은 세계최고의 핵 물리학자 이휘소 였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
서울 출생. 서울대학 화공과에 재학 중 1954년 도미, 미국 마이애미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196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입자물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1962년 프린스턴고급과학연구소 연구 후, 1963년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가 되고, 1966년부터 미국 스토니브룩의 뉴욕주립대학 교수로...
이휘소는 한국이 낳은 천재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휘소는 아인슈타인 보다 더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이휘소는 언제나 수석을 한 인물이다.
경기중학교 수석입학, 경기고 수석입학, 서울대 화공과 수석입학, 마이애미 대학 수석졸업, 펜실베니아 대학원 미국 역사이래 최고의 점수로 입학 등등..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설중 도서출판 뿌리에서 인용한 <<핵물리학자 이휘소>>에서 인용한 내용을 살펴보면
"펜실바니아 박사학위 시험은 해석역학, 광학, 상대성원리, 원자 및 핵물리학, 열역학, 양자역학, 수리물리학등 16개 과목이었다.]
시험결과는 평균 93점으로 차점이 평균71점인 것을 보면 엄청남 성적이었다.
이 결과로 프린스톤 고등연구소에 후레이저박사가 대담을 요청해왔다.
그는 전 미국 물리학과 박사 지망생 중 역사이래 가장 뛰어난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험답안을 검토해보니 새로운 이론전개나 학설까지 있어 놀라워했다.
이리하여 30이 채 안된 나이에 프린스톤 정식 연구원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휘소는 미국에서 항상 한 쪽 손에는 중국집 음식 배달 그릇을 들고 한쪽 손에는 책을 들고 온 시가지를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휘소는 그런 가운데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 까지 받았다.
스노퍼교수의 강의를 끝까지 들은 사람은 1명뿐이었다고 한다.이휘소가 스노퍼교수의 강의를 끝까지 들은 것이었다.
그는 스노퍼교수와의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매일 밤을 새며 숙제를 했다.
이 부분에서 감동 받은 이유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는 이휘소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휘소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이휘소는 대학을 졸업하고 페르미 랩의 정회원이 되었다.
페르미 랩의 정회원이 된 일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이휘소는 20여년만에 귀국을 했다.
그 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이휘소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휘소는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몸에 핵설계도를 넣어서 우리 나라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의문사를 당했다.
내가 이휘소를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이 부분에 있었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비판자였고 박대통령을 싫어했지만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이휘소를 아는 한국인은 그 당시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국을 벗어나면 벤자민 리(Benjamin W. Lee)로 알려진 그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하듯 핵물리학의 기본 체계인 소립자, 즉 참(Cham) 기본 입자의 존재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한국 최초의 핵 물리학자이다.
1935년 서울의 보문동에서 태어난 이휘소는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수석 합격한다.
서울대학교 화공과 2학년 때 도미하여 마이애미대학 물리과에 편입하였다가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스물 일곱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 그 당시 미국에서 손꼽히는 10명의 물리학자가 된 그는 핵물리학의 1인자로 부상한다.
아무튼 이휘소의 사망은 미 정부가 발표한 대로 교통사고다.
그러니까, 1977년 6월 16일 미국 시카고의 교외 고속도로에서 중앙 분리대를 넘은 트레일러가 마침 승용차에 타고 있던 이휘소 박사의 가족을 덮쳤다.
운전대에 앉은 이휘소 박사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부인 마리안 여사와 두 자녀는 경상을 입었다.
이런 사고 경위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이휘소박사의 사인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가 몸담아 왔던 페르미연구소에서 수백 명의 조문객에 의하여 장례식이 치러졌다.
박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그간의 이휘소 박사에 대한 애국심을 알린 뒤 훈장을 추서토록 지시하였다
.1977년 8월 24일 박대통령은 이휘소 박사의 어머니 박순희 여사를 통하여 그가 발휘한 한국인 정신은 길이 받들겠노라는 뜻이 담긴 국민훈장동백장을 전달하였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었는데. 한국인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 주신 과학자였는데......"
그날 박대통령은 박여사의 손을 꼭 붙잡고 그 말만 되풀이하였다.
더 이상 긴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눈물이 와락 쏟아졌기 때문이다.
박대통령의 손수건은 아까부터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휘소의 죽음과 함께 박대통령의 핵 개발에 대한 의지도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휘소에 대한 평]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의 능력은 이미 그 위에 있었다.
-오펜하이머(전 프린스턴 연구소장)
이휘소에게는 60년대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었어야 했다.
-양진녕(1957년 노벨상 수상자)
그와 같이 6개월간 생활하면서, 나는 도리어 이휘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겔만(1969년 노벨상 수상자)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년 앞당간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
-살람(1979년 노벨상 수상소감중에서)
참으로 아까운 위대한 인재를 생각하며, 잠깐이라도 경건한 맘을 가져본다.
- - 합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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