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지리산이 보이는 남녘 지방에는 비가 오락가락 했다. 이 비, 오랜 준비 끝에 떠난 여행자에게는 말할 수 없이 추적거리는 방해꾼이지만 지리산둘레, 그 막막한 산속의 다랑논에 물대어 양식을 농사지어야 했던 그들에겐 더없이 반갑고 달가운 비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다랑논은 거의 사라졌다.
|지리산 오지마을 가는 길에 만난 아름다운 시골마을
인류의 가장 위대한 노동의 산물이었고 자연에 대한 경건한 인류의 헌시였던 금싸라기 같았던 그 다랑논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잡초만이 무성하고 경치 좋은 곳에는 최신식으로 지은 그 양식의 문화적 근원을 따질 수 없는 요란한 펜션만이 반질대는 낮빛을 지닌 도회지 인을 기다리고 있다. 외공마을의 그 고풍스런 커다란 감나무 밑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두 개의 다리를 건너면 내공마을이고 거기서부터 임도을 따라 걷는 최고의 호사스런 트레킹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방앗간이었다는 커다란 기와집은 옛모습 그대로이나 방앗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집 사내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필자의 아내를 짝사랑 했다는 전설같은 추억만이 바람처럼 구전되고 있다. 길은 산속 마을로 굽이 굽이 흘러들고 길 옆에 남아 있는 논들에는 어제 오늘 내린 단비를 가득 담구고 모내기 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주산 트레킹 초입에서 바라다 본 내공마을의 전경(위, 왼쪽). |외공마을(아래 오른쪽). 곶감 특산지답게 감나무가 골목마다 있다.
두번째 다리 건너 그 집, 양철지붕의 집 뒤에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마치 하늘처럼 떠 받들고 집 뒤로 밤새 바람에 울어대던 대나무 숲이 무성히 우거진 그 집 앞의 작지 않은 논에는 지금 막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 둘은 허리를 굽혀 트랙터가 미처 심지 못한 구석진 곳에 모를 심고 있고 트렉터를 운전하는 할아버지의 음성은 쩌렁쩌렁하게 마을을 울린다. 물을 댄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들에는 지금 막 지고 있는 서산의 노을 빛을 담아 거울처럼 빛난다.
|모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
|모내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 굽어진 허리로 농사지은 쌀을 도회지의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생각하며 시름을 잊을 것이다
|모내기를 하려고 논에 물을 댄 모습. 논에 비친 모습들이 마치 한폭의 수채화 같다
이제 산속으로 들어서는 임도를 따라 들어 간다. 이 임도의 끝은 외공마을에서 중산리로 들어가다 중간에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 다른 골로 들어 가야 하는 반천마을의 배바위계곡까지 연결된다. 길이는 약 10여킬로, 시간은 네시간 안팎 소요 된다. 임도로 들어서자 길 양 옆은 온통 감나무와 밤나무군락이고 더 깊은 산속에는 산죽나무와 참나무 숲이다. 잡목사이로 삐죽이 내민 녹차로 마시는 작설나무의 잎, 그리고 길옆을 수놓은 수없이 많은 들꽃들...... 광대나물, 범의꼬리, 민들레, 애기괭이밥, 바람꽃, 깽깽이꽃, 광대수염 등 꽃들의 잔치이다.
|길따라 마냥 걷고 싶은 임도와 온갖 야생화들
|녹차와 작설차로 사용되는 작설나무. 지금은 잎이 크게 나와서 상품가지가 떨어지지만 마냥 싱그럽기만 하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이 고적한 산속에 홀로 피고 지던 영겁의 세월들이 그들의 작은 꽃잎 속에 우주의 신비를 담은 채 피고 지고 있다 . 한 시간 쯤 임도를 오르자 벌목을 하여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네거리가 나오고 계속직진으로 오르면 헬기장이 있는 산의 정상으로 향하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길잡이 하면 반천계곡과 고운계곡까지 이른다.
|하얀 찔레꽃을 보노라면 장사익의 찔레꽃 노래가 구설프게 생각나고 동화작가인 정채봉 작가의 <초등달과 밤배>에서 배고픈 오빠를 위해 곱추등이 어린 소녀가 네모난 양철 도시락에 하얀 찔레꽃을 따서 찔레꽃 도시락을 갖다준다. 시골 교실 뒷화단에 앉아 그 도시락을 열어 보고 꽃잎을 먹으며 눈물짓던 오빠의 그 애틋한 마음이 전해지는 듯 하다 .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찔레꽃처럼 살았지
당신은 찔레꽃
- 시, 노래 : 장사익 -
마을이 내려 다 보인다. 길과 다리와 길섶의 감나무들 사이로 집들의 푸르고 붉은 지붕들이 숲에 가리 워 어렴풋이 보인다. 마을을 사이에 두고 논물을 가득 담근 후 한해의 농사를 기다리는 다랑논들이 유리처럼 맑은 물에 세상을 반영한 채 마치 섬처럼 떠 있다. 길은 마을을 가르고 숲들은 집들을 가른다. 마을은 너무도 푸르른 숲에 싸여 숲이 주는 저 울림을 알지 못하는 채 평안하게 오랫동안 존재해 온 방식대로 인간의 역사를 담고, 사람들의 운명을 담아 고요히 숨죽이고 시간 속 어딘가를 홀로 가는 구름처럼 웅크리고 있다.
|임도에서 바라다 본 반천 마을 풍경
집들은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졌지만 자연을 닮아 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거슬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구조물이 아니라 자연의 하나가 되어 버린 듯이 멈추어 서서 앞서 가는 문명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집 어딘가에서 흰 연기가 솟아 오른다. 그 집 굴뚝 옆에 아버지가 벗어 놓은 지게가 서 있을 것이고 마루 밑에는 어머니의 오래 밭을 갈아 날이 무뎌진 낡은 호미가 던저져 있을 것이다. 이때쯤 감꽃을 실에 매달아 목에 목걸이처럼 두르고 하나씩 떼어 먹으며 먼 길 학교를 다녀 오던 이곳 소년소녀들은 모두 씩씩하게 자라 도회지 사람이 되어 갔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그리고 잊은 듯 하지만 세상이 주는 좌절과 절망, 슬픔, 인간에 대한 회의, 연민, 애증과 희노가 교차하여 자신이 상처받고 인생이 흔들릴 때 마다 이곳은 꿈꾸는 그곳이 된다.
지리산 그 어느 곳이 여행자에게 좋지 않은 곳이 있을까....? 더군다나 최근에는 지리산 둘레길이 불길처럼 유행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여행이란 인생의 축소판이다.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보편적인 현상 속에서 나의 존재를 찾으려 한다. 현상들은 전염병처럼 유행하고 그 유행에 몸 담아야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당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치판단을 암살하고 사회적인 시류에 맡김으로써 안위를 찾고자 한다.
|아름다운 꽃들, 숨죽여 바라보아야 하는 패랭이꽃(위 왼쪽) |바위틈에 몰래 숨어 있는 씀바귀꽃(위 오른쪽) |고풍스런 작약꽃(아래)
대중 속에 속해야만이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긍정되는 듯하는 것은 착시현상으로 본래의 나는 거기에 없고 타자에 의해 규정당한 나만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규정당한 보편자는 추상적인 것일 뿐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개별자야말로 진정한 참된 자아인 것이다. 나의 실체란 스스로가 이런 대중 속, 대중들의 행위 속에 속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빛은 나에게로 향하며 나로부터 퍼져 나가고 독자적인 자기활동의 결과로써 자기의 중심에 이르는 현재성을 획득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구차하게 상품화되어 버려 식상할 대로 식상한 유행에 따른 여행을 할 것이라면 그 먼 길을 가는 것이 조금은 이토록 아름다운 마을들에게 미안한 일일 것이다.
|구차하게 상품화되어 버려 식상할 대로 식상한 유행에 따른 여행을 할 것이라면 그 먼 길을 가는 것이 조금은 이토록 아름다운 마을들에게 미안한 일일 것이다
외공마을부터 시작하여 내공마을을 거쳐 임도를 따라 반천계곡과 고운계곡을 잇는 길을 걷는 것은 번잡한 문명에서 조금 벗어난 마을들을 둘러보는 일은 참으로 귀한 경험을 주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내공마을 들머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주산(831m)은 그야말로 지리산 천왕봉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임도를 따라 1시간 30분 남짓 오르면 지리산의 굽이치는 산맥들과 그 사이에 있는 천왕봉, 삼신봉, 연신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험이 있는 곳은 늘 그렇게 안개와 구름에 가리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듯이 이곳에서 조망하는 지리산은 구름과 청명한 산안개에 흐릿하게 가리워져 차라리 몽환적이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지리산의 봉우리들. 내가 나를 진정 볼수 없듯 이렇게 멀리서 바라다보는 지리산은 더없이 신령하고 한없는 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산 너머에 또 다른 산이 있고 그 산들은 수묵화처럼 깊은 골을 만들며 끝없는 산의 바다를 펼쳐 보여준다. 임도를 따라 걷다 보면 주산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주산은 병풍처럼 지리산의 동쪽을 두른 채 그 안으로 중산리와 반천, 외공, 내공마을을 활처럼 감싸고 남쪽은 하동으로 끝을 대어 청학동을 품고 있다. 우리민족이 찾아낸 최고의 이상향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곳을 중심으로 고운 최치원과 남명 조식선생 등 최고의 유학자들이 이곳에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배바위 계곡과 고운동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
|배바위 계곡에 있는 오래된 나무. 세월의 무게답게 나무에는 온갖 이끼와 기생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고운계곡은 반천마을의 끝 산속에 감추어져 있다. 덕산에서 중산리로 가다 중간쯤의 외공리 정각사 안내표지판을 지나서 왼편에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면 제대로 찾는 것이다. 마을을 제대로 찾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은 그런 산 계곡 속에 마을이 있을까 싶게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마을은 길 양옆 산속에 아득히 가리워져 있고 길은 곧장 마을을 가로 질러 산속으로 안내한다. 고운 최치원이 지리산을 소요하다 이곳을 발견하고 머물러 지낸후 이곳에서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구전될 정도로 계곡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고운동에 위치한 구름이 머무르고 간다는 운적사의 전경. 구름만 머무르다 가는 곳이 아니라 필자도 한없이 머물고 가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
|고운동에서 만난 꽃과 나무들
지금은 상류에 댐이 건설되어 그 신비감이 떨어졌지만 배바위 부근에서 합수하는 피리골과 고운계곡은 여전히 원시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계곡을 타고 오르다 보면 군데군데 배바위처럼 너럭바위들이 널려있어 쉬거나 앉아서 계류에 떠내려 오는 꽃잎들과 물속에 비친 가을의 단풍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5월의 싱그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 곳
중산리와 주산 트레킹의 중심지인 덕산 중고등학교 옆에 남명 조식선생의 서원이 있다. 서원 안에서 담 너머로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그 아래 흐르는 경호강은 오늘도 말없이 흐르며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류산 양단수를
- 조식 -
頭流山(두류산) 兩端水(양단수)를 녜 듯고 이졔 보니.
桃花(도화) 뜬 말근 물에 山影(산영)조차 잠겨셰라.
아희야. 武陵(무릉)이 어대매오 나난 옌가 하노라.
지리산의 명승인 양단수를 지난날 얘기로만 듣고서 이제 와 처음 보니.
복숭아꽃이 떠내려 가는 맑은 냇물에는 산그람자마저 어리어 있구나.
얘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내 생각으로는) 바로 여기가 무릉도원같이 여겨지노라.
|남명 조식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덕천서원. 지리산 둘레길 코스이기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바라본 강의 풍경
|덕산중고등학교 교정에서 만난 모습들
|텃밭에는 상추, 부추와 온갖 야채들이 있고 지붕을 가리우는 감나무는 곧 흰 꽃을 피울 것이다. 어릴적 감목걸이를 만들어 하나씩 떼어먹던 시절도 있었다. 이곳 곶감은 영국황실에서 인정한 곶감이다.
|덕산중고등학교 교정에 피어있던 이쁜 꽃들
|덕산중고등학교 교정. 이 천진난만한 시골소년은 알고 있을까......세월이 흐르면 지금의 이 순간들이 너무나 그리운 , 늘 가슴속에 꿈꾸던 그 곳이 바로 여기일 것이라고......
|내공, 반천 마을 가는길
1. 외공리 코스 : 대진고속도로이용 - 단성 톨게이트 - 중산리와 내대리 방향으로 직진 - 시천면사무소 - 다리 건너면 덕천서원 - 계속 중산리 방향으로 약 10분정도 진행- 외공리 버스정 류장 - 내공리 임도 - 주산
2. 반천의 배바위코스 : 시천면소의 덕천서원를 거쳐 외공리를 지나 - 천주교 지리산 수련원 이정표에서 좌회전 다리건너 5분정도 진행 - 반천마을 - 약 10여 분 차로 끝까지 오르면 무명 의 사찰 - 다리 건너서 계속 직진하면 외공마을로 이어지는 임도 - 다리 건너자 마자 우측의 산길로 접어들면 배바위 - 고운계곡 - 산청 발전소 상부댐에 이른다.
음악 : 내가 꿈꾸는 그 곳, By 배송희
알림
놀멍쉬멍여행기
;){kind=small}
